로맨스전하지 못한 서신

은청

24

“오늘 밤 내 욕구를 채워준다면 네 아씨와의 혼인을 생각해보마. 대신 너는 새벽 동이 틀 때까지, 내가 만족할 때까지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. 어디, 생각해보겠느냐.” 은향은 제가 방금 들은 게 무슨 말인지 믿어지지 않아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다.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. 도련님께서 천하디천한 이 몸을 원하신다는 것이다. 민혜 아가씨와 혼인을 생각해보겠다는 조건으로. 하지만 혼인해주겠다는 약조는 하지 않는다. 그 말인즉슨, 차후에 아무 소득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닐까. 눈앞이 캄캄하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. 이런 급박한 결정의 순간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. 그저 그날 사냥터에서 나누었던 첫 입맞춤의 기억만 떠올랐다. 다리가 후들거리고 목이 콱 메어왔다. 그냥 무작정 도망쳐나가고 싶었다. 하지만 그녀의 육신은, 그 입술은 이미 각오하고야 말았다. 저의 운명을. “아가씨와의 혼인을 한 번 더 생각해주시기만 한다면 뭐든 다 드리겠나이다.” 이 천한 것의 몸을 원하신다 해도요. 다리가 떨리고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을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용케 버티고 섰다. 해볼 테면 해보라는 그런 기세로 선 채 눈길은 허공에 두고 있었지만 미치도록 두려웠다. 그가 제게 정말 다가올까 봐. 아니, 천박하고 지조 없는 제게 질려서 다가오지 않을까 봐. “역시 그렇군, 주인을 향한 네 지조가 참 눈물겨워 오늘 내 욕정을 제대로 풀겠구나. 이거 고마워할 일인가.”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시준이 타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왔다. 천하디천한 여종 은향과 높고도 높은 양반 시준은 그렇게 그날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었다. 당시에 그들은 몰랐다. 자신들 앞에 잔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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